국토부, 레미콘업계 반발에 ‘배치플랜트 기준 완화’ 한발 물러서
작성일 : 2025.05.07 09:02
![]()
'건설공사 품질관리 업무지침 개정안' 어찌되나
레미콘업계 반발에 국토부 우선 선회 가닥
레미콘업계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현장 배치플랜트 허용정책이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이해당사자인 레미콘사업자 단체와 구체적 의견수렴 과정을 생략한 채 속도전으로 밀어붙이던 국토부의 질주에 제동이 걸렸다는 분석이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최근 공사 현장 내 레미콘 생산시설인 ‘배치플랜트(batch plant)’ 설치 기준을 완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던 정부가 일단 한걸음 물러나 접점을 찾기로 했다.
국토부는 지금까지 국책공사나 레미콘운송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특수 험지에서만 현장 배치플랜트의 설치·생산이 제한된 기준 아래 허가되어 왔음에도 갑작스레 이 규정을 바꿔 현장플랜트 설치 제한을 없애는 ‘건설공사 품질관리 업무지침 개정안’을 발표한 바 있다.
국토부가 행정 예고한 개정안의 핵심은 ‘90분 이내 건설 공사 현장에 공급이 불가능한 도서·벽지 지역 및 교통체증 지역’으로 제한했던 현장 배치플랜트 설치 기준을 ‘90분 이내 건설 공사 현장 공급이 불가능한 모든 경우’로 확대하는 내용이다.
현장 배치플랜트로 생산할 수 있는 물량을 소요량의 50% 이하로 제한하던 기준을 삭제해 현장 배치플랜트에서 레미콘 전량을 생산·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현장 배치플랜트에서 생산된 레미콘을 인근 건설 공사 현장까지 반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겼다.
그러나 국토부의 이같은 정책방향이 중소사업자가 대부분인 레미콘 생태계 질서를 무시한 일방적 건설사 편들기 아니냐는 레미콘업계의 반발에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한국레미콘공업협동조합연합회와 한국레미콘공업협회, 서울경인레미콘공업협동조합은 지난 3월 23일 입장문을 내고 국토교통부에서 행정 예고한 현장배치플랜트 설치·생산기준을 완화하는 ‘건설공사 품질관리 업무지침 개정안’에 대해 상생협력법 위반사항이라며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국토부는 레미콘업계의 저항이 거세지자 논의를 더 이어가기로 했다.
무리하게 밀어붙이던 국토부가 일단 멈춤으로 전환하면서 레미콘업계는 한숨 돌렸다는 반응이다.
한편 관련업계 전문가들은 정부가 레미콘 적기운송이라는 과제에 집착해 무조건적인 규제 완화를 밀어붙일게 아니라, 업계의 구조와 현실을 반영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대·중소 레미콘업체 모두 강력 반발
지침 강행되면 레미콘산업기반 붕괴
정부와 관련 업계에 따르면 국토교통부는 지난 3월 현장 배치플랜트 설치 기준을 완화하는 내용을 담은 ‘건설공사 품질관리 업무지침 개정안’을 행정 예고하고 기관·단체 등을 대상으로 의견 수렴을 진행했다.
이같은 배경에는 지난해 12월 23일 정부가 발표한 ‘건설산업 활력 제고 방안’이 자리하고 있다.
건설산업이 전방위 침체에 빠진 상황에서 건설경기를 살리고 품질향상을 위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삼표 성수동 공장과 풍납동 공장 철거후 서울시내 공사현장의 레미콘 적기공급 문제 해결책이 도마에 오른 것.
이 과정에서 지난해 반포주공 1단지 재건축 공사현장에 들어선 레미콘 현장배치플랜트 허가에 따른 여타 공사현장과의 형평성 논란도 함께 제기됐다.
현행 지침에 따르면, 현장배치플랜트는 레미콘업체가 90분 이내 현장에 도달하지 못하는 벽지‧도서 지역이거나 수요량이 급격히 증가한 경우에 예외적으로 인정된다.
이 경우에도 현장 외 반출은 금지하며, 소요량의 50%는 주변 레미콘제조업체가 공급하도록 협조해야 한다.
현행 지침은 중소레미콘의 판로 지원 및 사업영역 보호를 위해 2015년 제정돼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지난 3월 10일 갑작스레 국토부는 임시시설인 현장배치플랜트를 무제한 허용하는 지침 개정안을 예고했다.
개정안은 현장배치플랜트 설치‧생산 주체를 발주자까지 확대하고, 배치플랜트 설치‧생산 시 상생협력법상 사업조정신청을 기각하며, 생산량을 50%에서 전량으로 확대하고, 현장 밖 공사장으로의 반출도 허용하는 내용이다.
국토부 안대로 개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를 들어 발주자인 LH가 신도시 내 공사 현장 1곳에서 배치플랜트를 설치하면 무제한 생산해 인근 LH 공사 현장에 반출할 수 있게 된다.
주변 중소 레미콘업계의 납품 기회는 없어지고, 장기화될 경우 제조기반이 모두 붕괴될 수밖에 없다.
특히 IMF 외환위기 시절에도 30% 수준이었던 생산가동률이 역대 최저 수준인 17%인 상황에서, 폐업을 고민할 정도로 어려운 중소 레미콘업체에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는 상황이다.
국토부가 법률상 예고기간 준수하지 않고 강행
“지침 개정 전 업계와 협의했어야”
관련업계 종사자들에 의하면 반포주공 1단지 재건축 현장, 즉 서울시내 일반 주택공사 현장에 최초로 현장배치플랜트 허용이라는 첫단추가 열린 상황에서 균형추를 맞추기 위해 국토부가 ‘현장배치플랜트 허용 제한기준(사업조정신청 기각) 삭제’라는 무리수를 뒀다는 후문이다.
특히 연초 레미콘 관수단가 협상과 조달청의 중소기업경쟁품목 지정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레미콘업계가 미처 살필 여유가 없는 틈을 타 국토부의 이 같은 초유의 결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예상대로 국토부의 행정예고가 나오자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레미콘업계는 부랴부랴 총력 투쟁 모드로 전환하고 강력한 반발에 나섰다.
현재 레미콘업계는 대‧중소기업할 것 없이 크게 격양돼있다.
지난 3월 21일 긴급이사회에서 집회 등 강력한 집단행동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까지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레미콘업계 대표들은 특히 이번 국토부 지침은 근본적으로 하위 지침이 상위법(법률)을 위반하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성토했다.
상생협력법 제32조는 대기업 등의 사업 개시‧확장 등으로 중소기업 경영 악화 우려 시 중소기업자단체가 사업조정을 신청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국토부의 지침은 사업조정 신청 자체를 기각하도록 해 법률이 부여하는 신청기회를 박탈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레미콘업계는 이 부분에 대한 삭제가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지난 3월 20일 대‧중소 레미콘업계와 중소기업중앙회는 지침의 현행 유지와 상생법상 사업조정제도를 부인하는 조항 삭제를 국토부에 요청했다.
뿐만 아니라 국토부가 법상 예고기간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점도 꼬집었다.
행정절차법 제46조에 따르면 긴급한 필요가 있는 경우 외에는 20일 이상의 예고기간을 보장해야 하나, 이번 예고기간은 10일에 그쳤다는 것.
한국레미콘공업협동조합연합회 배조웅 이사장은 “정부의 ‘행정절차제도 실무편람’에도 특정 단체 간 갈등 우려 사항은 예고기간을 충분히 줘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며 “중소 업체의 생사가 달린 문제임에도 사전 의견 수렴조차 없었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역 레미콘을 우선 사용하도록 정부가 수십년간 일관되게 고수해온 행정방침이 한순간에 무너지게 생긴 상황에 ‘생존권’을 건 레미콘업계의 저항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레미콘연합회 관계자는 “국토부의 규제 완화로 다수 건설 현장에 배치플랜트가 설치가 현실화된다면 인근 레미콘 업체들은 죽으란 소리”라며 “현장에 배치플랜트가 있는데 누가 레미콘업체를 이용하겠느냐 레미콘업체들은 고사할 것”이라고 성토한 뒤, “국토부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고 더 강력한 대응도 불사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운반사업자 운반거부 문제를 왜 레미콘업계에 책임전가하나
적기공급 명분 현장배치플랜트 허용은 꼼수, 지침개정 당위성 없어
이 같은 반발에 국토부는 레미콘 및 운송업계의 목소리를 수용해 일단 개정안의 추진을 보류하는 쪽으로 급히 방향을 바꿔 잡았다.
국토부 관계자는 “레미콘업계의 우려가 워낙 크다 보니 업계 의견을 좀 더 수렴하고 접점을 찾으면서 가다듬자는 의미”라며 “레미콘업계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도 있어 그 부분에 대해선 정확히 설명하고 좀 더 시간을 가지며 이해의 간극을 해소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현장 배치플랜트란 시공사가 건설공사 현장에서 시멘트, 모래, 자갈 등을 조합해 레미콘을 직접 생산,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설비를 말한다.
해당 설비를 이용하면 레미콘 제조사로부터 레미콘을 조달받지 않아도 돼 공사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전문가들은 건설 현장의 납품 차질을 해소하면서도 업계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으로 ‘레미콘 생산 방식의 다양화’를 제시하고 있다.
올해 말 삼표 풍납 공장이 철수를 결정하면서 서울에 남은 레미콘 공장은 두 곳으로 줄게 됐다.
수요자인 건설사들은 서울 반포·한남·장위동 일대에 예정된 공사 현장에 레미콘 적기조달이 어렵지 않겠냐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온 것이 사실이다.
국토부가 민간부문 투자 확대 유도를 위한 건설업계 규제 완화 및 레미콘 수급 원활화를 위해 지침을 개정한다고 밝힌 주요 배경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이유를 들어 하루아침에 현장배치플랜트 허용으로 지침을 개정하기에는 당위성이 부족하다는 게 레미콘업계 주장이다.
“레미콘업계도 생사의 기로에 있고, 레미콘 공급 차질 문제는 벌크시멘트트레일러(BCT) 파업, 레미콘운반사업자 운반 거부에 기인한다는 것이 업계에 공론화된 사실인데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지 못하고 임시시설인 배치플랜트만 무제한 허용하는 것은 오히려 건설제조 기반을 무너뜨리는 처사”라고 한국레미콘공업협회 관계자는 목소리를 높였다.
박상헌 한국건설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미국 등 해외에서는 레미콘 공장이 아닌 건설 현장에서 물을 직접 배합하는 ‘건식 레미콘’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생산 방식을 이용하면 ‘90분 이내 현장 도착’ 조건으로 인한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며 “그간 국내에서는 습식 레미콘 외의 다른 생산 방식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는데, 이제는 다양화하려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규제·통제가 공급 차질 원인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먼저 마련돼야
현재 전국에는 공장설립 및 KS 인증을 취득한 1079개 레미콘 공장이 건설·토목 현장에 레미콘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최악의 건설경기 침체 속에서 레미콘업체들의 지난해 가동률은 역대 최저인 17%를 기록했다.
이는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 가동율 29.6%보다도 훨씬 낮은 수준이다.
올해에도 건설경기 침체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돼 레미콘업체들은 존립에 위협을 받고 있다.
레미콘연합회에 따르면, 그동안 일부 건설 현장에서는 레미콘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그 원인으로 레미콘업계가 지목하는 것은 탄소중립시설 구축으로 인한 생산량 감소, 벌크시멘트 트레일러 운전자들의 파업 등 시멘트 공급 차질과 레미콘 운반사업자들의 운반비 인상 파업, 터널·야간 운송 거부, 8·5제(아침 8시부터 5시까지 근무) 및 토요 휴무제와 같은 운반 거부 등 정부의 규제와 통제에 따른 부작용들이다.
업계는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먼저 마련돼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관련업계 전문가들은 국토부가 지금이라도 적극적으로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수도권 레미콘업체 영업담당자 A씨는 “시멘트 공급 차질과 레미콘 운반사업자의 운반 거부로 비롯된 레미콘 공급 차질 문제를 왜 난데없이 중소 레미콘 제조업계의 희생을 해법이랍시고 내밀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국토부는 기존 지침의 보호 법익이 무엇인지 잘 생각하고 이번 지침이 과연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행정조치였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해봐야 할 것”이라고 일침했다.
무엇보다도 현장배치플랜트에서 비KS 제품을 인근 현장에 공급하도록 하는 것은 국가 산업표준화정책에도 배치된다고 주장한다.
또 3기 신도시, 가덕도공항 등 정부의 주요 국책사업 공사에 대한 현장배치플랜트 설치는 협의를 통해 충분히 시행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모든 공사 현장에 영향을 미치게 될 지침 개정을 강행하려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고 레미콘업계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중소레미콘업계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영석 서울경인레미콘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레미콘업계가 건설시장 안정화를 위한 정부의 개선방안에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번 지침 개정과 같이 중요한 사안은 미리 업계와 소통해달라는 것이다”라며 “현행 유지를 원하는 레미콘업계의 의견을 정부에 충분히 전달했으며 정부도 재검토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만큼 정부의 검토 결과를 기다릴 것”이라고 밝혔다.
금주의 핫 뉴스